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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도서 명언 리뷰

by SnowRed 2021.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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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지은이: 김수현

 



왜 우리는 서로 아끼고 보듬어줘도 모자란 사람들의 가슴만 그렇게 후벼 파고, 정작 단호해야 할 사람에겐 아무 말도 못 하는 걸까? 정확한 표현으로 나를 지키면서도 사소한 일에는 날 세우지 않는,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될 순 없을까?

 




예쁘지 않으면 어떤가.

특별하지 않으면 어떤가.

당신은 당신 자체로 온전하며, 우리 삶은 여전히 소중하다

 




북 치고 장구 치고 니 하고 싶은 대로 치다 보면 그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춤추는 거여

-박막례 할머니-

 




불가능한 것을 소망한다면 강박증만 남을 뿐이다

 




그저 가볍게 지나가자.

결정권은 당신에게 있고, 누구도 쉽게 평가할 수 없으며, 당신의 삶은 여전히 당신의 것이다.

 




질문을 해서 꼰대가 되는 게 아니라 답을 강요해서 꼰대가 되는 것이다.

 




맞는 말이 소용 없는 이유. 알아도 안 되는게 있어요.

 




나는 그분의 삶을 따르고 싶지도 않았고 의견을 구한 적도 없다.

 




많은 이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이들을 너무 쉽게 비난하고, 때론 행복하지 않은 사람조차 타인에게 자신의 삶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보다 놀라운 건, 우리가 그런 말에 자주 상처받고 흔들린다는 점이다. 타인의 충고를 통해 삶을 돌아보고 성장할 수 도 있지만, 충고도 하나의 의견일 뿐, 언제나 진실인 건 아니다. 우리에게는 합리적인 의심과 검증이 필요하다.

 




가짜뉴스와 선동을 감별하기 위해 확인할 것은 언제나 첫째는 근거요, 둘째는 출처다. 충고에 편협한 진실만이 담겨 있다면, 근거도, 애정도 없는 참견이라면, 내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있다면, 흔들리지 않아도 된다.

당신의 삶에 어떤 권위도, 권한도 없는 이에게 심사위원의 자리를 내줄 필요는 없다.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헐뜯는다. -프아수아 드 라 로슈푸코-

 




의식하고, 결심하면, 조금 더 나은 방식을 찾아가자. 자신에게 섣부른 꼬리표를 붙이지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려 애쓰지도 말자.

우리는 모두 배우고 있고, 우리 자신으로서 더 나아질 것이다.

 




변화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닌 삶에 대한 애정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나이차이도 많고 동생이 아직 학생이다 보니, 종종 용돈을 주거나 필요한 물건을 사서 주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동생이 사실 예전엔 부담스러웠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꼭 고맙지?”라고 물었는데, 고맙기는 하지만, ‘해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라는 생각도 했다고.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 ‘복에 겨워 하는 말이 이런걸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동생은 정말 해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고맙지?” 라는 말 뒤에 그러니까, 부모님께 잘해라는 말을 꼭 덧붙였고 내 말을 듣지 않을 땐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동생에게 바라는 것 없이 호의를 배풀었다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조건을 붙였고 그게 동생에게 부담이 됐던 거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푼다. 그런데 그 마음은 정말 보상을 바라지 않는 호의였을까?

호의는 돼지고기까지, 이유 없는 소고기는 없다는 말처럼, 희생을 동반하는 지나친 호의에는 이유가 붙는다.

물론 희생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조건이 붙으면 공짜 핸드폰에 따라오는 수많은 약정처럼 희생은 강요가 될 수 있고, 후원과 청탁이 다르듯, 조건이 붙은 선심은 욕심이 된다.

 




돌아오지 않는 보상에 상대를 원망하게 된다면 나의 행복에 대한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고 있다면 상대에게 희생하는 것으로 나의 존재감을 찾으려 한다면 동의를 구한 적 없는 희생은 멈춰야 한다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친절해지려 노력하는 것이다. -윌터 배젓-

 




경계를 긋는 건 이기적인 게 아니다.

최소한의 경계도 없는 관계는 되레 분노와 원망, 자기 연민을 만들고, 과잉된 책임감이 상대를 의존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나를 돌볼 수 있을 때 타인의 삶도 도울 수 있는데 실제로 연구에서는 자신의 에너지를 잘 유지하는 사람이 타인과 세상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타인을 위해서도 나를 돌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돌보는 것에는 인색해진다면 그건 자신에 대한 무책임일 뿐. 내가 지치지 않아야 나를 지킬 수 있고, 그래야 나도, 관계도 건강해진다.

 




자신에게 맞는 건강한 경계를 정해 놓지 않으면 사람들은 당신의 욕구를 무시하게 된다.

-오프라 윈프리-

 




함께 있어도 공허하고 외로운 이들. 그건 관계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일 테다.

타인에 대한 본능적 신뢰감은 기초 믿음이라 부르는데 이 믿음이 없으면 타임을 쉽게 떠날 수 있는 조건적 존재로 바라보게 되어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끼기도, 친밀감을 공유하기도 어려워진다.

 




내가 가진 걸 뺏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껏 좋은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착취적인 관계가 지속된다면 거리를 두자. 기꺼이 당신을 만난 것을 행운이게 하라. 단 그럴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해야 한다. 우리는 인연을 맺음으로써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피해도 많이 당하는데 대부분 피해는 진실 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 부은 대가로 받는 벌이다.

-법정 스님-

 




편향이 자리를 잡으면 상대의 거부를 예상하고 감정적이거나 방어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러게 되면 친구와 멀어질 생각이 없었음에도 멀어졌듯이 마음속의 추측이 현실로 나타나고 역시, 이럴 줄 알았어라는 확신은 악순환을 만든다.

그래서 인지 이론은 분노 혹은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이 궁극적으로는 정신적인 허상으로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확신이 담긴 질문은 갈등을 만들지만, 염려가 담긴 질문은 해결의 실마리를 만든다.

 




권위적인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판단 기준보다는 외부의 권위와 규율, 집단의 판단을 기준으로 행위의 정당성을 얻는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다양한 가치관이 발달하기 보다는 획일적으로 기치관이 고정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종종 나만 이상한 거야?”라며 타인의 생각을 확인하려 하는데 이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라고 상대의 의견을 묻는걸 넘어 마치 정답을 확인하려는 듯, 자신의 행동이 사회와 집단의 잣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검증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불편함과 부조리에 예민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런 불편함은 익숙했던 문제들을 개선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고정된 자신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쏟아내는 개인을 향한 비난은 그저 한순간의 통쾌함을 바라는 폭력이자 정의, 예의,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억압이다. 설사 그 비난들이 변화를 만들지라도, 억압으로 생긴 변화는 언제나 우리를 불행하게 했다.

그러나 우리 서로 좀 내버려 두자. 조금 달라도, 실수해도, 부족해도 그냥 지나가자. 그래야, 나 자신도 그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다.

 




요즘은 관계 정리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기도 하고, 속 시원한 방법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관계 정리를 원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따금 관계 정리로 상처를 받은 사람뿐만 아니라, 관계 정리를 후회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다. 잘 맞지 않는 관계를 계속 정리하고 잘라내다 보니 지금은 만날 사람이 없어져서 외롭고, 남아 있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땐 그야말로 멘붕이라는 거다.

 




상대의 기분은, 상대의 태도는, 그리고 상대의 인격은 당신의 진실이 아니다.

 




그들이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

-미셀 오바마-

 




우연히 본 글에서, 글쓴이는 회사 동료의 바지에 콜라를 쏟앗다. 미안해하며 걱정을 했더니, 이렇게 답햇다고.

괜찮아요. 엉덩이가 조금 더 달콤해졌을 뿐.”

너그러운 둔감함과 언제나 다정하고 달콤하다.

 




이미 지나간 잘못에 대해 자사고하는 게 옳은가 생각하면, 사과는 늦더라도 옳다.

물론 사과를 받아줄지 받아주지 않을지는 상대의 몫이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통해 삶을 바라볼 뿐,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다만 신념이 경직되는 건 경계해야 한다.

맹목적인 믿음이 때론 사이비 종교 신도를 만들기에 오랜 세월 마음에 심어진 이게 옳다는 신념에도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내가 믿는 삶의 관점이 유일한 진리는 아닐 수 있고, 몇번을 검증한 신념에도 오류는 존재할 수 있으며, 가치관 역시 필요하면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방식으로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 삶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반복되는 충돌이 생겨난다면 설득될 용기를 내자.

 




세상이 원래 그런거라고. 돈 버는 건 원래 더럽고 치사한 일이니, 돈을 벌기 위해선 응당 무례와 괴로움을 느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갑질을 늘 그렇게도 당당했다.

 




쥐들의 아우슈비츠 현장에서 발견한 놀라운 점은 직접 고통을 받은 쥐가 아닌, 고통을 관찰한 쥐가 스트레스로 먼저 탈진했다는 사실이었다. 유리창 너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느꼈고,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 큰 무력감을 느낀 것이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생계를 위해 최소한의 대책을 세우고, 꾸준히 진지하게 하면 망하기도 쉽지 않다. 만약 잘 안된다 해도 다른 길을 가면 된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한 존재가 아니다.

한가지 꿈에 장렬히 전사할 필요는 없다.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퇴로는 열려 있다. 우리에게 안전한 포기보다 필요한 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다. 물론 선택도 책임도 각자의 몫이다.

다만 그냥 해보고 싶은 일에 용기가 필요한 이들이라면, 안될 것 같아도 안 할 수는 없는 그런 일이 있다면, 모쪼록 이 글이 용기가 되기를 바란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으니 이왕이면 사랑하는 일에 도전하는 게 낫다.

-짐캐리-

 




삶은 망설이기엔 너무 짧고, 조바심을 내기엔 너무 길다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누구를 만나도 괴로울 수밖에 없어요

 




타인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건 타인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게 아니라 자신의 무지에 대해 아는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방법 중 마셜 B. 로젠버그의 비폭력대화법을 추천한다. ‘가 아니라 를 중심으로 말해야 하는데, 이건 상대를 평가하는 건 피하고, 행위와 사실만으로 내 느낌과 욕구를 표현하는 말하기 기술이다.

예를 들어 너는 나를 무시한다와 같은 상대를 판단하는 문장을 내가 말할 때 네가 TV를 보면서 대답하면 (관찰) 나는 너한테 존중받고 싶었는데 (나의 욕구)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서운해(나의 감정)”라는 문장으로 바꾸는 것이다.

또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부탁을 덧붙일 수도 있다. “~하지 마라라는 금지의 언어보다는 “~해주면 좋겠어라는 긍정의 언어를 사용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가능한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나를 존중해줘와 같은 추상적 표현 대신, “TV가 아니라 나를 보면서 대답해줄 수 있겠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은 상대를 바꾸기 위해 비난을 했고, 상처 입은 상대는 비난으로 되갚는 식이었다.

 




우리는 맞다’, ‘틀리다’, ‘해야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처럼 잘잘못을 따지는 도덕주의적 판단에 익숙했다

(마셜 B. 로젠버그는 <비폭력대화>에서 과거 소수의 지배자가 대중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노예처럼 사고하도록 교육해야 했고, 도덕주의적 판단이 여기에 적합했다고 말한다. 다만, ‘가치 판단도덕주의적 판단을 혼동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정직, 평화, 사랑과 같은 가치에 대한 판단은 서로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 바람직한 방법이다.)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 노력해야, 상대에게 바라는 게 있을 대도 강요가 아닌 애정을 바탕으로 부탁할 수 있었다. 꼬리표를 붙이기나 비교와 같은 판단의 언어가 아닌 사랑과 연민의 언어를 배울 수 있었고, 상대 역시 관계가 소중해질수록 더 많은 노력을 했다.

 




내가 나중에 시잡가서 쫓겨날까 봐 무서워하면서 살면 좋겠어?”라고 물었다. 당연히 아닐 테다.

잠시 말이 없던 엄마는 그 뒤로 단 한번도 그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다.

 




얼마 전에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게스트로 나온 팟캐스트 방송을 들었다. 방송 중에 누군가가 엄마를 생각하면 슬프지 않냐고 물었는데, 다들 엄마를 생각하는데 왜 슬프냐는 반응을 보였다. 엄마는 고국에서 잘 살고 계시다고.

이럴 수가. 우리는 캠프파이어를 하다가도, 엄마 이야기만 나오면 다들 서럽게 울지 않았던가.

우리는 왜 그렇게 엄마를 생각하면 슬픈 걸까. 우리에게 엄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희생’, ‘무조건적 사랑이다.

 




결국 모성의 상향 평준화는 우리 모두를 죄책감과 상처에 취약한 존재로 만들 었다.

원래 이상적인 걸 정상적인 거라 여기면 소수의 이상적인 사람을 제외하곤 다 힘든 법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거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거나. 둘중 하나만 하고 있다면, 잘 살고 있는 것.

 




확신에 찬 말들은 포기하는 건 의지가 약한 거라고, 이력서에 생긴 공백은 감춰야 한다며, 방황과 실패를 부끄러움으로 만들곤 했다.

 




실제 핀란드에는 서로의 실패담을 공유하고 기념하는 실패의 날이 존재한다.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교육을 통해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것 역시 실패에 대한 너그러움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결코 실패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치열함을 다짐하고, 안전한 것을 좇으며 적게 도전하고, 적게 실패한다. 그런데 대안 없이 절박함만 계속되면 오히려 쉽게 절망하게 된다.

 




방황을 인정해달라. 방황했던 날들만큼 삶에 치열했던 순간도 없었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도 그들만의 힘든 전투를 하고 있다. -플라톤-

 




첫 책을 낼 때 나는 책을 내고 나면 무언가 더 특별해질 거라 생각했다.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더 특별한 삶이 웰컴표지판을 들고 서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딱히 달라진 게 없었으니, 책이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전작이 사랑을 받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도 행복의 크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에서의 성취감이 다른 부분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줄여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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